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의 행위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이라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먼저 유대인들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그들의 율법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행위가 어떠했다고 합니까? 결국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똑 같이 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판단이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돌아와서 자기를 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똑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으로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진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데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는 사람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자기들을 의롭다 하지 못하고 있는데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에 의지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는데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18절부터 20절을 읽어 보면 모두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한다면 그 뜻을 따라 행해야 하고 그 선한 것을 행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의지가 부러지는 지팡이요 유대인의 자랑이 허무한 것이요 유대인의 믿음이 무익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4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지금도 우리에게 넘치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우리를 용납하심과 우리를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이 멸시하는 것이나 회개하는 영혼에게는 자랑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오늘도 회개한 심령의 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시는 이가 주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님께로 피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주의 이름으로 행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