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하나님 자녀가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원수 맺고 살고, 원한을 풀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은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용서를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의 영이 사도 바울 일행의 길을 막으신 것과 같이 예수의 영은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막아서십니다. 용서로 인도하십니다. 예수의 마음을 주시니 용서를 구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용서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만큼 용서는 ‘아! 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는 것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됩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주위의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불편해서 살고, 어색하게 살고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기도의 자리에 나와 봐야 소용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와봐야 소용없습니다. 용서를 구하십시오.
용서를 잘 한 사람 중에 성경에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형들이라면 마땅히 동생을 지켜 주고 동생 곁에서 도와주기를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형들이 오히려 동생을 시기하고 동생을 떠밀고 왕 따 시켰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손에 죽게 되었었습니다. 형들이 살려 두지 않으려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요셉이라면 이런 형들의 과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셉은 잊어버립니다. 형들의 과실을 잊어버리기로 합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모든 과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 한 쪽에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용서가 아닙니다. 눈물이 날 만도 합니다. 씁니다. 그러나 용서가 요셉을 살렸습니다. 형들을 살렸습니다. 한 민족을 살렸습니다.
요셉은 용서를 잘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을 믿는 요셉에게 용서는 그렇게 이야기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이 심판자이신데 하나님이 주권자이신데 내가 용서하고 말고 그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군가 당신에게 과실을 범하면 그 과실로 인해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요셉처럼 말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보면 ‘나’는 용서하고 안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 ‘나’는 용서하여야 하는 ‘사람’입니다.
용서를 잘 했던 요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맛보기입니다. 주님은 용서하기 위해 오셨고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용서를 영원히 이루셨습니다. 용서는 우리 주님 안에서 굳게 세워졌습니다. 누구도 용서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치울 수 없게 하셨습니다. 용서를 되무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믿는 사람입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용서를 세워야지 누가 세울 수 있습니까? 용서보다 미움과 원한과 갈등이 있는 세상에 화평을 세울 사람이 그리스도인, 믿는 자 말고 누가 있겠는지 생각해 봅시다. 용서하면서 살라고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사는 겁니다.
과실은 사람이 짓습니다. 내게 가장 잘 해주어야 할 사람이 나에게 가장 실망을 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과실에도 이런 잘못에도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하고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고 용서받고 또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와서 믿는 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여러분 안에서 풍성하게 되고 넘쳐흘러 나서 용서하고 용서함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